# 아 아직 멀었다니까요
## AI로 속도는 올라갔는데, 생산성은 딱히
Codex와 Claude, 각종 MCP와 SKILL을 붙여 대부분의 작업을 처리하기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산출물은 다양해졌고, 내가 기존에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어려운 일들조차, 이제는 간단한 흐름으로 이뤄낼 수 있게 됐다. 당장 이번주 산출물만 봐도 그렇다.
시뮬레이션 미들웨어 기능 구현, 로컬 Docker와 원격 서버 동작 확인, 회의록과 음성 메모 정리, 업무 관리 도구와 노트 기록 동기화, 외부 제안서의 기술 리스크 검토. 그 사이에 AI 에이전트와 스킬 라우터, 기억 저장소 같은 작업 환경 정비까지 끼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IT 스타트업에서 살아남기|문과 출신]]이다. 단지 AI라는 새로운 거인의 어깨를 발견했을 뿐이지.
그런데, 얼마간의 회고를 정리해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프로덕트를 만들고 티켓을 쳐내는 일 자체는 확실히 빨라졌다. 코드도, 문서 초안도, 요약도 금방 나온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게 정말 되는지, 그리고 확인한 내용을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도 되는지, 즉, 전통적인 QA 자체는 여전히 내 자리에 남아있었다.
## 다 된 거 맞아요?
사실, 기능 구현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런타임에 장애물 배치하고 이동하는 기능을 추가하고, 삭제하고, 목록을 조회하는 API를 붙이고, UI를 얹고, 로컬과 원격 컨테이너에 배포한다. 체크리스트를 만들면 깔끔하게 채워진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완료"라고 적고 끝냈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진짜로 완료도 봐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분명 로컬에서는 잘 돌아갔는데, 원격에서는 기동조차 안된다. API 포맷은 맞췄는데 리눅스서버 시간이 안맞아서 인증을 안받는다. 테스트 자체는 통과해도, 특정 조건은 애초에 재현조차 할 수 없다. 코드를 빨리 뽑아낼수록, 이런 "애매한 지점"은 점점 늘어만 간다. 시간당 산출물은 늘어나지만, 검수 시간은 여전히 그대로니까.
그래서 이번 주간보고에는, 기존 체크리스트 대신, 어디까지 확인했다는 "인수인계"를 공유했다. 나는 어디까지 확인했고, 후속 작업자는 어디부터 보면 되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작동이 이상한데, 어디부터 확인하면 좋을지에 대한 의견 자체를 보고서에 남겼다. 솔직히, 보고서 위에는 간단하게 마크다운 체크(`- [x]`)를 찍는게 훨씬 보기 좋다. 하지만, 확인 범위가 붙은 기록은 다음 사람이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고, 그게 없는 완료는 결국 누군가 처음부터 다시 의심해야 한다. 그 비용은 대개 나중에, 더 비싸게 청구된다.
> 물론 이 시기에 개인적인 일로 일주일정도 휴가를 냈기도 했어서, 겸사겸사 진행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 어차피 안읽을 거라면, 굳이 남길 필요도 없죠
회의록 STT, 업무 티켓, 사내 위키, 주간 업무일지... 기록을 남기는 일은 너무 쉬워졌다. git log를 따면 자동으로 주간보고 양식으로 바뀌고, 회의 녹음을 넣으면 자동으로 전사와 요약이 나온다. 기록을 쌓는 속도만큼은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기록을 읽지 않는다. 사내위키에 MCP로 연결해두면, 간신히 요약본이나마 가져가서 브리핑 버전으로 훑어보는 정도이다. 결국, 정보가 연결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는, 정보와 업무를 연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데이터 추출 방식 논의, 이동체 방향성 문제, 담당자별 피드백, 납품 QA 정리. 각각은 스스로 완결성을 지니는 기록인데, 연결되지 않으면 "그래서 이제 뭘 해야하는데요?"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심지어, 이번 주 업무시간 절반은, 기존 기록을 시계열&네트워크로 연결하는데 사용했다.
누가 무엇을 확인했고, 어떤 항목은 무슨 이유로 보류된 상태이고, 다음 주 피드백이 오면 어떤 업무가 진행돼야하는지, 그래서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놓인 과업은 무엇인지... 이 모든 정보는 연결이라는 행위 없이는 알 수 없다. 일주일, 아니 한 달 뒤에라도 그 기록만 보고 바로 움직일 수 있는가. 기록의 쓸모는 여기에서 나온다.
## 우리에게는 다시 하이퍼텍스트가 필요해요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문서 자체는 하이퍼텍스트 형태로 연결되어있지만, "그래서 내가 원하는 정보는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기나긴 탐색이 필요했다. 구글은 그 탐색을 단순화시켰다. 미리 인덱싱해두고, 키워드에 맞춰 "유사한" 문서를 찾아주는 방식으로 사용자에게 더 나은 정보 검색 경험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순위에 있어, 문서 간 연결(Link)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작업 환경을 재구축하면서, 무언가 분명해졌다. 지금 시점의 LLM에게 있어 요약 및 재구성 능력은 차고 넘친다. 분석 및 제안 능력 또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이미 멀찌감치 넘어선지 오래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의사결정이 필요하고, 의사결정에 필요한 자료는 다시 직접 읽어야한다. 그런데,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서 읽을 수 있는지 모른다면, 당연히 생산성은 제자리일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개발자와 코드는 병목이 아니다.
오늘의 작업 기록은 데일리 노트로, 오래 유지할 규칙은 장기 기억 저장소로, 공유할 내용은 팀 업무 도구나 월간 업무일지로. 사람에게는 당연한 이 구분이 언어모델에게는 없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해주지 않으면, 언어모델은 일을 수행하기는커녕 다시 새로운 일을 만들어낸다. 간단한 핫픽스로 끝날 일을, 거대한 아키텍처 추가로 만들어버리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모델이 더 똑똑해졌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리라 본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아니다. 기록을 정리하고, 방향성을 강하게 제한하고, 목적지를 명확하게 지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한다.
## 의심은 정말로 비싼 자원이에요
제안서를 검토하며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외부 자료를 읽고 플랫폼 제안 문구를 다듬어야하는데, 모델은 정작 문장이 매끄러운지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기술 표현이 정확한지, 그래서 실제로 가능한 방향인지, 성과 지표가 말이 되는지, 이 요구사항은 빼면 안되는지, 정답을 찾을 수 없어서 계속 도그푸딩을 해야했다. 언어모델은 근거를 대조하고 문장을 정리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된다. 초안도 금방 나오고, 표현도 그럴듯하다. 문제는 바로 그 "그럴듯함"이다.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비용이 사실상 0으로 떨어진 지금, 그 문장을 의심하는 비용은 반대로 올라간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닌지, 이건 우리가 감당 못 할 범위는 아닌지, 여기 리스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질문은 여전히 사람이 던져야 하고, 답을 확인하는 데도 여전히 사람의 시간이 든다. 결국 서명하는 쪽은 사람이니까. 문서에 도장이 찍히는 순간, "AI가 써준 건데요"라는 변명은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는다.
## 그래서, 아직 멀었다니까요
아직, 일은, 여전하다. 코드와 문서와 요약은 넘쳐나지만, 그게 정말 되는지 확인하고, 흩어진 기록을 연결하고, 그럴듯한 문장을 의심하기는 여전히 내 일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내 밥그릇이 온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AI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줄어든 것은 "만드는 일"의 일부일 뿐이고, "책임지는 일"은 오히려 늘었다. 검증하고, 연결하고, 의심하는 일. 화려하지도 않고 보고서에 잘 드러나지도 않지만, 결국 생산성은 여기서 판가름난다. 그러니 한동안은 안심하며, AI를 계속 굴려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