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올바름을 계산하라, 더 나은 날을 위해
《우리 안의 우생학》서평
## 서언: 차별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가끔 누군가로부터 “인생영화는 뭔가요?” 같은 질문을 받으면, 보통은 그런 것은 없다고 답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굳이, 꼭 하나를 정해서 이야기해달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간의 망설임 후에, <가타카>를 이야기한다. 고3때 인터넷 어디에선가 추천받아 봤는데, 마음 깊은 곳 어디에 깊이 박혀버렸다.
<가타카>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이 “적합한”과 “부적합한” 사람으로 나뉘어, 삶의 방향이 결정된 상태로 살아간다. 주인공은 초인적인 노력 끝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 아마 대다수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영화에서 진정으로 두려운 부분은, 이러한 질서가 증오나 이기심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우리 모두의 발전"이라는 선의에서 합리적인 차별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공동체를 더 낫게 만들자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차별"은, 다시 한 번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떠올렸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다양한 차별이, "능력에 따라 당연한" 합리성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공부 못하면 벌 받아야지"라거나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불이익을 당해야 공정하다"는,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말 여럿이 그 사례이다. 허나 이런 믿음은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하고, 차별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차별은 선의와 합리성의 탈을 쓰고,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며, 구조적 차별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책 《우리 안의 우생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을 통해 되짚어본다. 조선우생협회의 체질 개량론 , 박정희 정권기의 가족계획사업, 한센인과 장애인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혼혈아 해외 입양 등, 대부분 "국가 발전"이나 "공동체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 결과 특정 집단은 '열등한' 존재가 되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대상으로 취급당한다. 차별은 사회적 합리성으로 위장되고, 제도화를 거쳐, 우리 삶에 다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교재 《인간과 사회》에서 강조하는 사회학적 상상력 개념을 활용하여 우생학이라는 현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보려 한다. 특정 개인의 좌절을 단순한 개인의 불행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생학적 사회 질서라는 "맥락"을 통해 구조를 읽어내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된 우생학적 정책이나 일상적 차별은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가타카>, 《우리 안의 우생학》,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모두는 형식은 다르나 모두 같은 메시지가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차별은 존재하며, 언제나 정당화의 과정을 거치고, 모두의 삶을 지배한다.
## 우생학의 한국적 전개
우생학을 단순히 서구의 이론적 산물로만 바라보면, 한국 근현대사라는 맥락 속에 존재하는 "실천양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생학이 변형 및 전개된 맥락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우생협회(이하 '협회')가 주장한 '민족 체질 개량론'이 이에 좋은 사례이다. 협회는 조선 민족을 '열등한 신체'를 가진 집단으로 규정하였으며, 극복을 위해서는 '우량아 생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민족 재생산의 핵심으로 간주되었으며, '좋은 어머니'로서 '튼튼한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받았다. 즉, 사회화 과정에서 특정한 역할로 도구화 및 대상화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우생학적 흐름은 이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정권 시기의 가족계획사업이다. 비록 국가 발전과 빈곤 해소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장애인 및 한센인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혼혈아 해외 입양 등, 소수자 배제를 위해 적극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은 ‘국가 발전’과 ‘민족 건강’이라는 숭고한 논리로 정당화되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도는 더더욱 공고화되었다. 사회진화론이 약자의 도태를 사회 발전의 과정으로 정당화했던 것처럼, 다양한 차별적인 제도는 생명의 옳고 그름을 적절한 ‘효율성’ 논리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 효율성의 바탕에는, 과학의 언어가 있었다. 혈액형, 유전자, 체질, 산전 진단 등의 개념은 중립적 사실로 보이나, 실제로는 사회적 목적과 결합하여 생명의 가치를 분류하고 관리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국가 권력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력한 통제 장치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산전 진단 기술은 “장애 예방”이라는 명분으로 확산되었다. 선택적 출산은 부모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었겠으나, 실제로는 공중보건 담론과 결합하여, 장애아를 “생산”하지 않아야하는 압력으로 작동하였다.
가족계획은 국민 생활 향상, 산전 진단은 건강 보호라는 명분을 가지고, 특정 집단을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차별로 기능했다. 베버의 합리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인간이 효율성에 따라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공중보건이라는 선의로 포장되었다.
## 격리와 배제
우생학은 출산과 의료를 넘어 사회적 약자를 감추는 정책으로 발전했다. 한센인들은 치료보다 격리가 강조되었고, 강제 단종과 낙태를 통해 재생산이 차단되었다. 여기에는 “공동체 보호”라는 명분이 있었다.
혼혈아 또한 사회 동질성을 위협하였기에, 해외 입양이라는 형태로 제거되었다. 피부색이라는 자의적인 기준을 통해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상등품으로 수출”되었다. 부녀보호소 또한 ‘도덕 보호’라는 명분으로 여성을 감시하고 규율하는 장치였다.
이러한 격리와 배제는 특정 집단을 공포-혐오-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구조적 차별을 제도화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구별짓기는 권력이 스스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 우생학의 현대적 변주
보호와 발전이라는 언어로 정당화된 약자 배제 장치는 과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보건, 교육, 돌봄,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시 나타난다. 과거 전체주의 담론 아래서 여성이 국가적 프로젝트에 복무하기를 요구받았던 것처럼, 현대사회의 여성은 재생산의 책임을 지는 존재로 호명된다. 저출산 위기 담론에서 여성은 국가를 위해 출산하기를 요구받으며, 모성은 공동체 생존을 위한 과제가 된다.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러, 우생학은 인간의 재생산 그 자체를 상품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부모들은 ‘좋은 아기’를 위해 검진, 사교육, 소비에 몰두하고, 자녀는 경쟁을 위한 프로젝트로 취급된다.건강식품 과소비나 백신 거부는 ‘자연스러움’을 내세우는, 우생학적 변주로 볼 수 있다. 결국 다시 한 번, “쓸모 있는 사람”을 구분해내는, 자본주의적 판단이다.
우생학은 금융화된 삶의 양식을 통해 좀 더 은밀하게 작동하며, 생명에 대한 가치판단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확대된다. 고령 인구는 생산성이 낮으므로 사회적 부담이 되며, 이주민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므로 안전 비용이 추가된다. 몸과 삶은 투자수익률 계산이 가능한 표로 환원된다. 차별 구조는 점차 세련된 방식으로 재현된다.
## 결언: 우생학을 위한 변명과 그 한계
우생학적 통제와 차별은 분명, 저출산 대응과 공중보건 관리, 교육 경쟁력 확보 등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정 집단 통제가 사회 전체 효율성을 높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언제라도 과도한 상대주의로 흐를 수 있다. “어떤 차별은 정당하다”는 논리는, 매우 쉽게 “모든 차별이 정당하다”로 확장이 가능하며, 언제라도 “어떤 차별은 ‘더’ 정당하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정책 사례가 이를 증명하는데, 기초연금 개편 논의는 노인을 재정적 위험으로 묘사했으며,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는 이주민을 ‘자원’으로 취급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기능주의적 관점이 얼마나 손쉽게 차별을 제도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차별과 배제는 중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차별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탐색하며, 공동체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종종 권장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차별이 작동하는 방식을 해석하되, 정당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한다. 차별은 선의에서 비롯될 수 있으나, 선의조차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각각의 차별은 고립된 사건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차별은 다른 차별로 이어져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노인에 대한 배제로, 이주민에 대한 혐오는 여성과 빈민에게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을 되짚어 올라가면, 언제나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찾아낼 수 있다.
우생학적 주장과 정책은 대부분 선하고 숭고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민족을 더 건강하게, 국민의 복지를 위하여... 우리가 아닌 모두를 배제하고 억압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예민하게 차별을 감시하고, 차별 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성찰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회는 언제나 가장 불리한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야하며, 공동체주의적인 연대와 상호책임 원칙을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효율과 경쟁의 언어 대신, 정의와 공동선을 이용하여, 더 나은 방식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